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제2차 세계 대전 (문단 편집) == 전후 [[연합국]] == 연합국의 수는 매우 많지만 우선 이 문단에서는 추축국들과 가장 적극적으로 교전하고 이후 [[상임이사국]]에 자리에 오른 [[영국]], [[소련]], [[미국]], [[프랑스]], [[중화민국 국민정부]]를 중심으로 서술한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영국 국기.svg|width=100%]]}}} || || [[영국|{{{#ffffff '''영국'''}}}]][br]''{{{#fff United Kingdom of Great Britain and Northern Ireland}}}'' || [[영국]]은 승전 이후 전후 복구와 재건에 힘썼다. 타 유럽 국가보다 영국 본토와 영국민의 피해는 상대적으로 적었지만, 제1차 세계 대전에 이은 또다른 괴멸적 전쟁으로 영국 경제는 침체기에 접어들게 된다. 특히 핵심 식민지인 인도의 독립으로 대영제국의 세계적 영향력은 크게 저하되었다. 이후 영국은 [[베버리지 보고서]]의 원칙에 따른 [[복지국가]]론에 따라 국가를 재건하였으며, 사상 처음으로 복지 국가 개념이 실현됐다.[* 다만, 일각에서는 과도한 복지 때문에 오히려 영국이 경제적 침체기에 들어갔다는 주장도 있다. 자세한 내용은 [[영국/역사 속의 경제위기|영국병]] 참조.] 이 시기 영국은 더 이상 식민제국을 유지할 수 없다는 판단으로[* 여기에는 UN 창설멤버가 된 [[사우디아라비아]]의 강력한 요구가 있었기도 했다. 훗날 사우디아라비아 + 쿠웨이트 + 구 영국 식민지였던 4개 국가들로 [[걸프 협력회의]]가 창설된다.] 식민지들을 차례로 독립시켜 [[대영제국]]을 점진적으로 해체하고, 이를 [[영연방]]이라는 국제 기구로 재편했다. 이 영연방을 통해 영국은 [[영연방 왕국]] 구성국들은 물론, 자국에 우호적인 과거 피식민 국가들과의 긴밀한 관계를 유지하였으며, 영국의 전후 복구는 이 [[영연방]] 각국의 지원과 협력, 영연방 경제 연합을 통해 이뤄졌다. 이 시기 영연방 각국 사람들이 영국으로 건너가 부족한 일손을 채우기도 했는데, 이는 1972년 전까지 영연방 각국 사이에 자유 무역과 자유 이주가 보장되었기 때문이다. 영연방이라는 기구와, 세계 초강대국인 [[미국]]의 배려, 그리고 영국 문화의 소프트 파워 덕분에 영국은 초강대국에서 물러난 오늘날까지 어느 정도 세계적 영향력을 유지한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미국 국기.svg|width=100%]]}}} || || [[미국|{{{#ffffff '''미국'''}}}]][br]''{{{#fff United States of America}}}'' || [[미국]]은 타 상임이사국들과는 달리 본토의 피해가 거의 없었기에[* 일본군 잠수함이 함포로 미국 본토의 정유 시설을 포격한다든가 일본 잠수함에서 이륙한 수상기가 미국의 숲에 폭탄을 투하해 대규모 산불을 유발하거나 독일군 U보트가 미 동해안의 항구를 공격하는 등의 간혈적 수준의 본토 공격은 있었지만 미국의 전쟁 수행 능력에 타격을 줄 순 없는 매우 경미한 수준이었다.] [[냉전]] 시기 [[제1세계]]의 중심으로서 [[초강대국]]이 되었다. 나치 독일과 일본 제국을 패망시킨 덕에 미국은 태평양 전역과 서유럽의 패권을 차지할 수 있었고 기존 유럽의 열강들을 포함해 세계의 많은 나라들이 압도적인 경제력과 군사력, [[핵무기]]까지 얻은 미국의 절대적인 영향력 하에 놓였다. [[해리 트루먼]] 행정부 시기 미국은 전세계적인 전후 복구와 경제 부흥에 힘쓰며 서방 세계의 정치적 지도자로 떠올랐으며, 군사는 물론 경제와 문화적으로도 헤게모니를 가지게 된다. 이때를 기점으로 국제 사회에 대한 미국의 입김은 기존 제국주의 열강들을 제치고 남을 수준으로 막강해졌으며 사실상 [[유엔]]을 비롯한 현재의 국제 질서가 정립되었다. 그러나 동유럽의 또 다른 초강대국인 소련하고 정치적으로 대립하기 시작해 곧 [[냉전]]이 이어졌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소련 국기.svg|width=100%]]}}} || || [[소련|{{{#ffd700 '''소련'''}}}]][br]''{{{#ffd700 Union of Soviet Socialist Republics}}}'' || 제2차 세계 대전 이전까지만 해도 선대 [[러시아 제국]]보다 영토가 축소되었던 [[소련]]은 승전 이후 과거 상실했던 영토들을 대부분 재점령했다. [[발트 3국]]을 병합했고 [[커즌 선|동부 폴란드]]([[비아위스토크]] 지역 제외)와 [[베사라비아]]를 획득했으며, 목표했던 [[핀란드]] 전토 점령은 실패했지만 대신 [[페첸가]], [[카렐리야]], 살라를 획득했다. 이 중에는 제정 시절에는 타국의 영토였던 지역들도 있었다. 동부 [[갈리치아]]나 [[체코슬로바키아]]를 해방하면서 얻은 [[자카르파탸|카르파티아 루테니아]], 그리고 [[베사라비아]]를 반환받을 때 얻은 북부 부코비나는 모두 옛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영토였다. 그리고 한때 [[독일 제국]]의 영토였던 [[클라이페다]](메멜)와 독일이 [[제1차 세계 대전]] 패전 후에도 건사하는 데 성공했던 [[칼리닌그라드|동프로이센 북부]]까지 차지했으며 나아가 극동 전선에서도 비교적 짧은 참전치고 [[남사할린]]의 재수복과 전 [[쿠릴 열도]]의 점령이라는 상당한 수확을 얻을 수 있었다. 소련은 나치 독일과의 전쟁에서 2,000 ~ 2,700만 명의 사망자가 발생했지만 동구권과 초기 중공, 북한, 북베트남 등 유라시아 각지에 다수의 위성국을 세워 상당한 국제적 영향력을 확보하고 미국과 함께 초강대국이라는 타이틀을 차지하는 등 승리의 열매는 달콤했다. 이 당시 유럽에는 소련을 견제할 수 있는 국가가 없었다. 프랑스는 나치 독일에 점령 당해 나라 자체가 너무 약해졌고, 전통적으로 강력했던 군사력도 크게 꺾였다. 영국은 사정이 그나마 나았으나 섬나라 특성상 육군이 소련군에 크게 밀렸는데, 소련군은 이에 반해 종전 시점에 13전선군이라는 어마어마한 군사력을 보유했다. 당시 서유럽은 미국의 도움 없이는 소련군을 상대로 자국 방어조차 거의 불가능했다. 이후 1948년부터 1991년 붕괴 전까지, 소련은 [[냉전]] 체제 하에서 [[제2세계|공산주의 진영]]의 중심으로서 미국과 대립했다. 비록 2,000~2,700만의 인민들이 죽고 국토가 초토화되었지만, 그 대가로 얻은 것은 세계 양대 패권국의 지위였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프랑스 국기.svg|width=100%]]}}} || || [[프랑스|{{{#ffffff '''프랑스'''}}}]][br]''{{{#fff French Republic}}}'' || [[프랑스]]는 다른 4개국에 비해서는 [[프랑스 침공]]에서 독일에게 6주만에 털리고 망명정부로 전락해버려 전쟁에서의 기여도가 낮다. 전후 전장이 된 국토를 수습하고 전후 복구 사업을 진행하였으며 비시 프랑스 부역자들에 대한 강도 높은 전범재판이 이루어졌다. 다행히 [[바르샤바 봉기|바르샤바와는 다르게]] 수도 파리를 나치 독일군이 후퇴하면서 초토화하는 것을 시민들이 저항하면서 막았기 때문에 어느 정도 수도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과거의 정치적인 영향력과 소련 견제를 의식한 미국, 영국의 도움 덕분에 [[유엔]] [[상임이사국]] 자리는 확보했지만 크게 떨어진 위신과 정치적 영향력을 되찾겠다는 일념하에 미국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핵무기]] 개발을 강행하고 식민지를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지로 여러 차례 전쟁을 벌이기도 했다.([[제1차 인도차이나 전쟁]], [[알제리 전쟁]]) 결국 독립 전쟁들에서의 패배와 [[수에즈 전쟁]]에서 [[영국]], [[이스라엘]]과 함께 제대로 망신 당한 것으로 인해 프랑스는 식민지의 연쇄적인 독립 요구에 직면하게 될 수밖에 없었다. 사회적으로는 [[드골]]주의와 [[사민주의]]의 극렬한 좌우대립과 허무주의를 겪었다. 하지만 이런 대립 속에서도 프랑스 특유의 보편적 복지 체제를 형성하였다. 이 시기 프랑스는 전후 경제 복구와 유럽의 평화 체제 정착 및 또 다른 전쟁의 발발을 막기 위해 유럽 각국과의 협력 필요성을 느꼈고, 훗날 [[유럽 연합]]으로까지 이어지게 되는 최초의 유럽 공동체인 유럽석탄철강 공동체를 형성하여 오늘날 독일과 함께 유럽 공동체를 이끄는 두 주축이 된다. ---- || {{{#!wiki style="margin: -5px -10px" [[파일:대만 국기.svg|width=100%]]}}} || || [[중화민국 국민정부|{{{#ffffff '''중화민국'''}}}]][br]''{{{#fff Republic of China}}}'' || [[중화민국 국민정부|중화민국]]은 1,500 ~ 2,000만의 사망자가 발생해 소련 다음으로 막대한 인명피해를 입었지만 연합국 가담과 중일전쟁의 최종 승전을 통해 몰락한 [[일본 제국]]을 대체하여 [[아시아]]의 주도 국가로 자리매김할 뻔했다. 그러나 간신히 봉합했던 [[국공내전]]이 재발발하고 끝내 [[중국공산당]]의 승리로 기존의 [[중화민국 국민정부|국민정부]]가 [[타이완 섬]]으로 [[국부천대]]하면서 철수하였다. 중국은 아직까지도 공산당 중심의 항일로 일본을 물리쳤다는 영화 등을 만들지만, 학계에는 중국공산당의 항일 운동은 보잘것 없었다는 시각이 지배적이다. 주로 국민당 계열의 군대가 일본군과 박 터지게 싸우는 동안 뒤에서 세력이나 키웠다는 비판도 듣는다. 현재는 중국공산당이 얼마나 기여를 했든 어쨌든 국민당이 중일전쟁에서 중화민국의 주력이었다는 것이 정설이다. 1949년 대륙에서 [[중국|중화인민공화국]]이 건국되었으나 공산 중국 역시 곧 [[미국]]과 [[소련]] 양쪽에 밉보여 1970년대까지 고립되었다. 그 동안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 [[제사해 운동]]을 통해 국력을 소모했으나 [[중화민국 국민정부|중화민국]]이 UN에서 쫓겨난 자리를 또 다시 채운 후 야심차게 등장한 [[덩샤오핑]]의 개혁, 개방으로 중국은 허울뿐인 공산주의 국가로 변했다. 제2차 세계 대전의 승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한 5개국이라 평가받은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의 후신인 [[러시아]], 그리고 중화민국을 대체한 [[중국]][* 1971년, 유엔은 중국의 국민당 정부를 중국의 불법 정부로 간주하여 상임이사국에서 축출하였고 [[중화인민공화국]]의 공산당 정부가 중국의 합법 정부로서 중화민국의 상임이사국 자리를 승계받았으며 대만은 결국 UN에서 자진탈퇴했다.]은 [[UN]] [[상임이사국]]으로서 현재도 강한 영향력을 행사한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